큐비즘(입체파)의 창시자, 초현실주의의 핵심이면서 끊임없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그림에 담아냈던 화가, 피카소는 스페인 출신으로 인생의 상당 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프랑스 국립 피카소미술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피카소에 대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사고까지 엿볼 수 있다.
피카소미술관에선 5,000여 점의 작품 중 400여 점을 5개 층 37개 관에서 소개하고 있다. 1973년 피카소가 세상을 떠나고 1년 후, 그의 가족들은 상속세 대신 피카소 작품 50여 점을 국가에 기증했고, 이 작품들을 전시하고자 '17세기 파리의 대저택 중 가장 웅장하고, 가장 특별하고, 가장 사치스러운 곳'인 오텔 살레(Hôtel Salé)를 리모델링하여 1985년 개관한 것이 바로 피카소미술관이다. 그 후로도 유족과 친구들은 꾸준히 작품들을 기증하며 현재 5,0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회화, 스케치, 조각, 도자기, 그래픽아트와 같은 피카소의 작품만이 아니라 피카소가 읽던 책, 그가 쓰던 시와 노트들, 그가 수집한 조각, 사진, 영상 등 20만 개가 넘는 아카이브를 보유하고 있다.
여유로운 일요일 오후, 피카소미술관에 들어가니 한산한 미술관 앞과 달리 내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있었다. 1층에선 잭슨 폴록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내년 1월 19일까지 전시된다고 한다. 피카소 작품은 2층부터 전시돼있다. 2층으로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1963년 '그림은 나보다 강해서, 그 명령에 따르게 만든다'는 피카소의 말이었다. 피카소에게 있어서 그림은 어떤 것이었길래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을까.
피카소미술관을 꼭 가야 하는 이유를 꼽자면, 피카소의 작품들을 시대별로 모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화풍이 초반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큐비즘 화풍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이토록 다양한 과정을 겪은 줄은, 피카소미술관을 방문해서야 알 수 있었다.
표현: 만남 속에서 발전해 온 피카소의 큐비즘
피카소미술관에는 피카소의 작품만 있지 않다. 피카소의 작품을 돌아보는 중에 색다른 그림이 있길래 봤더니 앙리 마티스의 그림이었다. 피카소는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거래하거나 수집했는데 그런 수집품들이 중간중간있었다. 피카소와 마티스의 50년에 걸친 예술적 교류는 현대 서양미술에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를 대표하는 큐비즘(입체파)은 사물을 여러 방향에서 포착하여 한 화폭에 담아내는 예술사조를 의미한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예술운동 중 하나인 입체파는 파블로 피카소와 주르주 블라크의 우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1907년 가을 살롱에서 폴 세잔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피카소는 원근법에 따라 자연을 원통형, 구형, 원뿔로 대했다. 폴 세잔에게서 영감을 받은 두 사람은 그해 11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주선으로 만나 회화적 대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 시기 피카소와 블라크의 공동 작업은 긴밀하여 누구의 작품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피카소는 새로운 표현의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1924년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이 초현실자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다.
전쟁: 장식으로서의 그림이 아닌, 적에게 저항하는 전쟁 도구로서의 그림
피카소는 형식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명백히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피카소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고, 이는 피카소의 작품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내전
1937년 4월 26일, 나치 독일에 의해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서 폭격이 발생했다. 나치 공군에 의해 몇 시간 만에 4천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 비극을 접한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현재 게르니카는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에 있다. 보존상의 이유로 '게르니카'를 보려면 스페인으로 가야 한다.
스페인 내전 이후 피카소는 '우는 여자'를 다수 창작했다.
이렇게 2차대전을 일으킨 나치는 정치적 선전도구로 예술을 이용하고자 1937년 7월 18일 ‘위대한 독일 미술전’을, 바로 다음 날인 7월 19일엔 ‘퇴폐미술전’을 열었다. ‘퇴폐미술전’은 현대미술을 탄압하기 위한 노골적인 경멸이 담긴 전시로 그림들은 액자도 없이 걸렸으며, 심지어 바닥에 세워놓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퇴폐미술전’엔 매일 평균 2만 명이 찾으며 ‘위대한 독일 미술전’보다 5배 많은 200만 명의 관람객을 불러 모았다. ‘퇴폐미술전’에는 샤갈, 고흐, 피카소를 비롯하여 표현주의의 다리파, 사회비평화가 막스 베크만, 게오르게 그로스 등의 작가들이 있었다. ‘퇴폐미술전’은 당시 전위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현대미술의 백미를 감상할 절호의 기회로 되며 오히려 모더니즘의 전진을 앞당겼다. 사람들은 나치가 찬양한 예술가들이 아니라, 나치에 의해 ‘퇴폐’로 낙인찍힌 예술가들을 인정하며 나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나치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친구를 잃는 등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피카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끔찍한 억압의 세월은 내가 예술뿐만 아니라 내 인격과도 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림은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에 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 도구다.”
한국전쟁
피카소는 한국과 지구 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한국과 인연이 깊은 화가다. 휴전협정 막바지 협정 조인 사무실로 지어진 새 막사 정면에 피카소의 비둘기가 조각된 것으로 유명하다. 8,378km 떨어진 프랑스라는 먼 나라, 한국과는 상관없을 것 같은 유럽의 한 화가가 우리나라와도 이렇게 인연이 깊은 줄은, 인상적이다.
그렇기에 더욱 보고 싶었다. 피카소미술관 5층으로 올라가니 그토록 보고 싶었던 '한국에서의 학살'을 만날 수 있었다. 1951년 창작된 이 작품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안 돼 충청북도 노근리 쌍굴다리에서 1950년 7월 미군의 기관총에 의해 400명의 민간인이 무참히 학살된 사건, ‘노근리학살’에서 영감을 받아 그려진 작품이다.
“사람들은 그림이 색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틀렸다. 그림은 주제다.”라고 피카소는 말한다. 그리자유¹기법으로 그려진 이 대형 캔버스는 주제를 지닌 작품이지 표면에 그어진 선과 색의 상호작용으로 축소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한 황폐한 배경, 벌거벗은 여자와 아이들, 얼굴 없는 군인 등, 이 작품의 그 어떤 형상도 한국과 관련 있어 보이지 않는다.
'게르니카'도 마찬가지. 개인적으로 입체파, 큐비즘으로 일컬어지는 피카소의 표현 방식은 본인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낯설고 어색하다. 하지만 게르니카의 거대한 화폭 속 고통으로 일그러진 사람들의 얼굴과 비명들, 사지의 경련은 피카소의 표현이 그야말로 적합하다. 전쟁의 참혹상이 추상적으로 꺾이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비판이 축소되지 않고 그대로 전해져온다. 피카소는 이렇듯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큐비즘이라는 추상적 표현을 통해 스페인과 한국에서 전쟁의 참상만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이 발생하는 모든 전쟁을 비난했다.
1 그리자유(grisaille) | 흰색과 검은색 물감으로만 명암의 톤을 만들어 사물 형태를 표현하는 기법
멈추지 않는 피카소의 탐구, 과정에서 과정으로 창조에서 창조로
피카소의 생애를 따라 작품을 보며 느낀 것은 그동안 알고 있던 피카소의 화풍은 완성된 게 아닌 과정이라는 것이다. 피카소는 인생 전 기간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 방식을 탐구해 나갔고, 작품은 그런 탐구 과정에서 얻어진 하나의 흔적이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얻은 하나의 인상적인 경험이 된다. 완벽한 것은 없다. 알게 모르게 한국의 가정에서 태어나, 한국의 교육과정을 밟고, 사회생활도 해본 우리에게 완벽주의에서 벗어나서 일단 시작하는 것을 모토로,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에 시작조차 못 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피카소는 그런 우리에게 그림으로서 교훈을 주고 있다. 피카소의 작품을 보면 완성이라는 게 뭘까 싶다. 원래 창조라는 것이 끝이 없는 것이고, 끝이 없기에 완성, 완벽이란 없는 것이다.
특히나 하나의 표현 방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조각, 판화, 드로잉, 구조물 등 다양한 표현을 고안하며 그 탐구의 폭을 심화시켜 나갔다. 뿐만아니라 앙리 마티스, 폴 세잔,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 출신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의 소장품은 그가 자신만의 세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세상과, 다른 창작가들과 끊임없이 대화했음을 보여준다.
큐비즘에서 초현실주의로, 초현실주의에서 다시 큐비즘으로, 그 외 아직 규정되지 않은 다양한 예술사조들도 피카소의 작품 속에 녹아있을 것만 같다. 그런 피카소의 눈엔 21세기 AI가 등장하는 우리 시대는 어떻게 보일까 궁금하다. 빠르게 변화하고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 우리 시대에 피카소 같은 그런 열정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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