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광장으로 알려진 트라팔가 광장, 그 광장의 배경에는 미술관이 하나 있다. 바로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이다. 윌리엄 터너의 작품부터 강렬한 색채와 거침없는 붓터치로 지금까지 우리의 마음을 지금까지 울리는 고흐의 그림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가득한 내셔널 갤러리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곳이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 감동을 이어줄 수 있는 매력적인 미술관이 있다. 내셔널 갤러리 주위에 위치한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가 바로 그곳이다. 국립 초상화 미술관, 영국을 빛낸 사람들의 초상화를 전시해 둔 미술관이다.
관람은 높은 층부터 내려오는 것이 좋다. 시대 순으로 전시돼있어 그 편이 관람에 용이하다. 우선 4층에는 런던의 전경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 위치해 있다. 음식 외에 음료도 판다고 하니 박물관을 구경한 후 지칠 때 한숨 돌리기에 적합하다. 3층에는 1300년부터 1850년까지의 역사적인 인물들의 초상화가 전시돼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부터 조선 왕조의 초상화와 비슷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사로잡은 건 3층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초상화이다. 우리가 엘리자베스 1세 하면 떠올리는 바로 그 이미지를 실제 초상화로 만나볼 수 있는 건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화려한 장신구 속에서도 영국을 이끈 여왕의 기품과 카리스마가 그대로 느껴졌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진주를 좋아했다고 한다. 초상화에서도 여왕은 진주 목걸이를 빼놓지 않고 착용하고 있었다. 화려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평소에는 검소한 차림을 선호했다고 한다. 왕의 초상화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와 얼마나 비슷하게 그렸냐가 아니라, 그 왕이 어떻게 보였는지, 즉 위엄과 기품을 얼마나 잘 표현했느냐이다. 그런 면에서 여왕의 초상화는 확실히 성공했다. 당시 유행하던 초상화 기법을 보는 재미는 덤이다. 그림을 정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리관 끝에 붙어있는 거울을 통해 제대로 된 초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신기한 기법이었다.
한 층을 내려가면 영국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펼쳐진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찰스 다윈, 아이작 뉴턴, 윈스턴 처칠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들의 초상화가 곳곳에 즐비해 있다. 문학, 과학, 정치 등 다방면에서 세계를 이끌었던 이들이 모습을 한 공간에서 보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림을 보면 한 사람의 생애가 보인다고 했을까. 아이작 뉴턴의 위풍당당한 모습에서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과 왕립학회 회원으로 명예를 누렸던 그의 생애를 절로 느낄 수 있었다. 찰스 다윈과 윈스턴 처칠의 초상화에서는 진지함과 엄숙함이 강조됐다. 특히나 어두운 색조를 사용하니 인물들을 절로 무겁고 위엄 있게 만들었다. 처칠의 젊은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 등 여학생들에게 꿈을 선사해 준 브론테 자매의 초상화 등 많은 인물들의 초상화가 전시돼있으니, 특히나 2층부터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교과서에서 보던 위대한 인물들을 보는 것도 신기했지만, 동시대 인물들의 초상화들이 가장 눈을 사로잡았다. 현재의 영국을 대표하는 얼굴들을 다 모아둔 곳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특히나 문화의 강국, 스크린이나 TV에서 본 익숙한 얼굴들이 수없이 자리 잡고 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의 젊은 시절 모습이, 왼쪽으로 돌리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리 한쪽을 꼬고 앉은 그녀의 모습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다름 아닌 그녀의 표정이다. 가장 화려한 생활을 했던 그녀였지만 어딘가 공허하고 쓸쓸해 보이는 느낌이 든다. 짧고도 불행했던 그녀의 삶을 아는 우리에게 그녀의 초상화는 단순한 그림을 넘어 그녀의 생애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끔 만든다.
폴 매카트니와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봤다면 그 다음 공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우리에게는 해리포터 맥고나걸 교수로 유명한 매기 스미스, 영국작가 중 현재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초상화 등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남아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초상화는 자화상이라는 점에서 특이했다. 그는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기 모습을 그렸지만 호크니가 자기의 모습을 그렸다고 한눈에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사실, 화가의 작품을 알고 있어도 그 화가의 얼굴을 아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당연히 호크니가 다른 사람을 그린 작품일거라 생각했지만, 작품의 제목을 보고서야 그가 자기 자신을 그렸다는 걸 알수 있었다. 호크니의 첫인상은 이렇게 꽤나 인상적이었다. 구글에 검색하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사진이 아닌, 그가 그린 초상화로 그의 실제 모습을 처음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아닐까 싶다. 고흐가 자신의 자화상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듯, 그에 못지 않게 호크니의 자화상도 큰 인상으로 남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초상화는 사람의 이름과 생애를 한 장의 그림에 담아낸다. 영국의 역사 그리고 이를 만든 사람들의 생애를 초상화를 통해 만나보는 건 영국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세계를 제패하던 영국이 문화강국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을 볼 수 있고, 세계를 주름잡았던 이들을 길러낸 영국이 얼마나 큰 나라였는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영국이 자랑하는 과거와 현재의 얼굴들이 담긴 이 미술관에서, 영국의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한국에도 이런 초상화 박물관이 생길 수 있기를 바라며, 기대를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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