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9월 셋째 주 주말은 특별한 행사로 파리가 붐빈다. 바로 ‘유럽 문화유산의 날’(Journées européennes du patrimoine)이다. 1984년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던 자크 랑은 9월 셋째 주 주말을 ‘역사 유적지 일반 공개일’로 제정하며 일반 시민들이 더 쉽게 문화유산을 접할 기회를 만들었다. 이후 프랑스에서만 열렸던 이 행사는 1985년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열린 유럽평의회 건축문화유산 각료회의에서 유럽 전역에 도입되는 것으로 추진되었고, 이후 많은 나라들이 참여하고 있다. ‘유럽 문화유산의 날’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정확히 2000년부터라고 한다. 오직 일 년의 이틀만 열리는 특별한 날을 위해 각 정부 기관과 문화기관들은 특별한 프로그램들을 열고는 한다. 프랑스 대통령의 집무실 겸 공관인 엘리제궁과 국회의사당 등 평소에는 잘 열리지 않던 곳들이 열려 더욱 인기를 얻곤 한다.
유럽 문화유산의 날을 맞아 샤넬의 공방 ‘la Galerie du 19M’을 방문했다. 샤넬의 공방이라 불리는 19M은 파리의 패션 예술계를 대표하는 장인들이 함께 모여 작업하는 공간이다. 샤넬의 정식 파트너로 선정된 공방의 장인들만이 근무할 수 있고, 현재 12개의 부문에서 약 700명의 근로자가 근무하고 있다. 자수 및 트위드 전문 공방 ‘르사즈(Lesage)‘, 1939년에 설립된 자수 공방 '몽퇴(Atelier Montex)', 1950년에 설립된 금세공 장신구 전문 공방 '구센(Goosens)', 깃털과 꽃장식 전문 공방 '르마리에(Le Marie) 등이 자리 잡고 있다. 19M라는 특이한 이름은 샤넬의 독보적인 숫자이자 코코 샤넬의 생일인 19일, 그리고 샤넬 공방이 위치한 파리 19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샤넬의 공방이 파리 19구에 자리 잡은 것도 우연이 아닌 의도된 연출 같다.
오픈 시간은 9시였다. 여유롭게 15분 전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19M 앞에 늘어선 줄을 본 순간 아차 싶었다. 여기는 세계 3대 패션브랜드 중 하나인 샤넬이라는 걸. 샤넬의 작업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샤넬의 명성과 인기에 걸맞은 줄이었다. 줄을 서고 나니 직원이 배지 하나씩을 나눠준다. 일종의 입장권이다. 예약제는 아니지만 시간대별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제한한다. 덕분에 입장을 하고 나서는 붐비는 사람 속에 혼잡하게 관람하는 것이 아닌 여유로운 관람을 진행했다.
방마다 설명을 해주는 직원들이 있다. 언어는 당연히 불어다. 그래도 일부 직원들은 영어로도 설명을 해준다. 질문에도 친절히 답해준다. 건물의 외관에 대한 설명을 지나 샤넬 장인들이 직접 작업하는 공간으로 향했다. 이동을 개인으로 하는 건 철저히 금지된다. 다 같이 관람한 뒤, 다음 파트로 같이 이동한다. 작업 현장은 대부분 ‘르사주’를 중심으로 공개된다. ‘르사주’는 샤넬과 오랜 파트너로 자수 파트를 맡고 있다. 샤넬뿐만 아니라 루이비통, 입생로랑 등 파리의 오트 쿠튀르의 제작을 맡고 있다. 디자인을 기반으로 자수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놓고 있는 걸 보면, 가히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하다. 실제로 장인이 시연도 해주는 모습도 직접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가 아닌가 생각한다. 실로 하나하나 자수를 놓고 어떤 소재를 사용하고, 어떤 기법을 사용하는지도 친절히 설명해 준다.
르사주가 맡는 또 하나의 분야가 있는데 바로 트위드이다. 샤넬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패션인 바로 ‘트위드 재킷’이다. 당시 스코틀랜드 남성들이 자주 사용했던 옷감인 트위드를 여성용 옷에 도입한 건 코코 샤넬의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심플하면서도 우아함과 실용성은 놓치지 않은 트위드 재킷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트위드는 여러 개의 굵은 실이 엮어 만드는데 생각보다 손기술이 많이 들어간다. 장인의 기술을 보고 있자니 베틀이 생각났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옷이 아닌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드는 옷이니만큼 손이 많이 들어갈 만했다. 트위드 원단과 함께 그 원단으로 만든 샤넬의 옷들을 직접 보여주는 공간도 있었다. 샤넬의 시그니처 패션답게 어디에도 본 적 없는 특색 있는 원단들이었다. 샤넬의 패션쇼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샤넬의 백스테이지를 본 듯한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들이었다.
작업 현장들에서 다음 공간으로 이동하면 샤넬이 자랑하는 드레스들을 전시해 놓은 공간들이 나온다. 상설 전시회로, 평상시에 시민들에게 공개되는 유일한 장소이다. 카페로 보이는 장소를 지나 안쪽으로 가면 전시회의 시작이다. 샤넬이 그간 했던 자수와 직물들을 사용한 우수한 디자인을 전시해 놓았다. 휘황찬란한 드레스들과 하나의 드레스가 만들어지기까지 사용된 수많은 장식품들. 장인들의 작업 현장을 보고 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전시회 중간마다 직원들은 친절하게 작품을 설명해 줬다. 그 덕에 내 눈앞에 있는 드레스가 바로 칼 라거펠트의 유작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파리의 작은 모자가게에서 시작한 샤넬이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인들을 매혹하는 명품이 되기까지, 샤넬이 수많은 이들에게 우아함의 상징으로 자리 잡기까지의 그 과정이 담긴 전시였다.
오늘의 패션은 단순한 옷을 넘어 하나의 예술에 가깝다. 특히나 명품의 세계는 더욱 그러하다. 하나의 디테일이 차이를 만들기에 장인의 숙련된 손길은 필수이다. 수많은 공장이 기계를 도입하며 자동화를 만들어가는 그 사이, 샤넬은 사람의 숨결로 살아 숨 쉬는 예술을 만들고 있었다. ‘유럽 문화유산의 날’이 아니었다면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예술을 만드는 700명의 장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 글을 마친다.
ⓒ 2010-2024 안데르센 All Rights Reserved.
프랑스 경제의 심장, 베르시에서 만나는 현대적 건축과 정책의 혁신 - 프랑스 경제 재정부 (4) | 2024.10.16 |
---|---|
모습을 드러낸 에콜 데 보자르 (0) | 2024.10.15 |
이브 생 로랑의 작품세계에 빠져들다 (2) | 2024.10.13 |
파리 건축 박물관, 건축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담다 (0) | 2024.10.12 |
월간 안데르센 10월호 (0) | 2024.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