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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예술교육의 심장, 영국 왕립미술아카데미

월간 안데르센 2025.4월호

by 안데르센 2025. 4. 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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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예술의 중심은 파리였다.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은 언제나 예술의 도시인 파리에 모여 교류하며 영감을 나누었다. 영국이 예술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 미술이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으니, 지금부터 채 300년도 되지 않았다. 예술의 불모지라 여겨지던 영국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미술계를 뒤흔든 화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지금까지도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윌리엄 터너다. 그런 터너가 최연소의 나이로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들어가 그림을 배우고 후에는 그림을 가르쳤던 곳이 바로 영국 왕립미술아카데미이다. 런던에서도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이는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에서 영국 왕립미술아카데미는 아직도 그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1768년에 개관한 영국 왕립미술아카데미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각예술 교육기관이다. 단순한 예술교육기관을 넘어 이제는 중요한 전시장으로서의 역할도 이어가고 있다. 접근성이 뛰어난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일반 대중들에게도 개방된 공간이 많다. 아카데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아카데미의 초대 총장인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동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는 영국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아카데미를 통해 많은 예술가를 길러

낸 인물이다. 아카데미에서 그의 공로를 기려 정중앙에 동상을 세우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아카데미 건물은 크게 벌링턴 하우스와 벌링턴 가든 두 구역으로 나뉜다.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동상을 지나 벌링턴 하우스에 들어서면, 지하 통로를 통해 벌링턴 가든으로 이동할 수 있다. 가는 통로에도 회원들의 습작들이 즐비해 있다. 연습으로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실제 모델이 된 거장들의 작품과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다. 벌링턴 하우스 1층에는 과거 학생들이 실습했던 작품들을 모아둔 전시실이 있는데 벌링턴 하우스의 하이라이트 공간으로 자리잡을 만하다. 왕립미술아카데미는 드로잉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기관이었다. 이는 초대 총장인 레이놀즈 경의 교육철학과도 이어지는데, 그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예술을 시작으로 과거의 명작들에 대한 모작이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라 믿었다. 특히나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을 중심으로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모작하는 교육을 진행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을 많이 모작한 만큼 벌링턴 하우스 1층의 메인 갤러리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모작이 크게 걸려있다. '최후의 만찬' 모작은 3명의 작가에 의해 5년에 걸쳐 완성됐다고 하는데 진품과 비슷한 퀄리티를 가지고 있는 만큼 이후 교육 실습용 작품으로 사용했다. 프레스코화 기법으로 제작된 원작에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부분까지도 확인이 가능했다고 하니, '최후의 만찬' 복원 연구자들조차 원작의 복원을 위해 왕립미술아카데미에 보관돼 있는 그림을 참고했다고 한다. 워낙에 큰 그림이라 한눈에 담기도 어렵지만 거장의 걸작을 그것도 오롯이 나 혼자만 있는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다.'최후의 만찬'이 주는 임팩트가 워낙에 커서 다른 그림들은 자연스레 묻혔지만 바티칸 미술관에 있는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조각상과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 줄지어 있었다. 더불어 당시 학생들이 사용했던 물감, 종이, 팔레트, 붓 등이 함께 전시돼 있어 영국 시각예술 교육의 흔적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훌륭한 작품의 뒤에는 치열한 고민과 끊임없는 노력이 존재한다.

 

 

벌링턴 하우스를 둘러본 후 벌링턴 가든으로 넘어가 본다. 벌링턴 가든에는 두 개의 유료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중 '브라질, 브라질' 전시를 감상했다. 1910~1970년대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브라질의 모더니즘 작가 10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회였다. 남미 특유의 강렬한 색채와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으며, 공간 또한 작품 감상에 최적화돼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작가는 브라질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아니타 말파티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 모더니스트 타르실라 두 아마랄이었다. 또한, 원주민 출신 예술가 잔이라 다 모타에 실바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타르실라 두 아말라는 브라질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다섯 명의 그룹’을 결성하며 예술 운동을 주도했다. 이 그룹의 일원이었던 문인 오스바우지 지 앙트라지는 '식인주의 선언'을 통해, 브라질이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융합하여 독자적인 예술을 창조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브라질 모더니즘 작품들은 단순한 서구 문명의 모방을 넘어, 브라질만의 색채와 개성을 담고 있다. 특히 전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호수'는 선명한 색감과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브라질의 생동감 넘치는 자연을 표현하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모던, 테이트 브리튼 등 영국이 자랑하는 미술관만 해도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이다. 예술의 불모지였던 영국이 이제는 문화의 강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에는 교육이 있고, 그 중심에는 영국 왕립미술아카데미라는 상징적인 장소가 있다. 오늘날 왕립미술아카데미는 교육기관과 전시관, 두 개의 중대한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시대가 변해도 예술이 가진 힘은 변하지 않는다. 훌륭한 작품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존재하며, 왕립미술아카데미는 그 노력의 역사를 현재까지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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